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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축구 커뮤니티에서 00년대 초반 떠돌던 4대미드필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단, 베컴, 피구,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베론 이렇게 4명이였습니다

파르마시절 코파 이탈리아와 유로파리그의 전신인 UEFA컵을 우승시키고, 라치오로 이적해서는 99/00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고 코파이탈리아, 그리고 슈퍼컵을 우승시키면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특히 슈퍼컵에서 전시즌 트레블의 주인공인 맨유를 상대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베론은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여러 축구인들에게 각인되었고 퍼거슨의 눈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베론은 01-02시즌 시즌 퍼거슨이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습니다. 이적료는 그당시 잉글랜드 기준 최고 액수였던 2천 800만 유로였습니다.

베론 영입 당시 퍼거슨은 ‘선수한명에게 이렇게 비싼돈을 써본건 처음이다. 하지만 베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거기다 베론의 플레이스타일은 잉글랜드 축구에 적합하다는 의견까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전형적인 no10인 트레콰르티스타 스타일이 아니라, 수비가담도 적극적으로 하며 볼을 오래끄는 이른바 볼호그 타입이 아닌 간결하게 바로바로 볼을 넘겨주고 스루패스도 과감하게 찌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EPL의 빠른 템포 축구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며 세리에보다 공간이 많은 이피엘에 오히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베론은 실패했죠.
어째서 퍼기는 그토록 원하던 베론을 영입했지만 실패했던 것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트레블 직후 시즌은 99/00시즌과 00/01시즌 맨유와 전술을 살펴봐야합니다. 트레블 이후 퍼거슨은 마음속에 은퇴를 계속 고민했고, 은퇴 전에 한번 더 유럽정상에 올라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트레블 이후로 맨유는 대권으로 가는길에 번번히 무너졌습니다.
이때 맨유의 문제점으로 계속해서 지적되었던 점은 2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피엘은 442 시스템이 대세였고 맨유 또한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고 맨유의 주된 라이벌인 아스날 역시 442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유럽에서 상대하는 대부분의 팀들은 433같은 시스템을 쓰면서 3미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거죠.
442포메이션
2 미들과 3미들 그냥 대결해서는 수적 열세에 처하게 되는겁니다.

퍼거슨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트레블을 달성했던 9899시즌때는 양풀백을 굉장히 중앙지향적으로 배치하기도하고, 유벤투스전에는 베컴을 조금 더 중앙지향적으로 활용하는 형태를 가동하기도 했으나 이는 임시방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이 수적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2000년 8강전 2차전 맨유홈에서 레알마드리드의 델보스케는 3미들시스템을 맨유상대로 가동했습니다. 스티브 맥마나만과 이반 엘게라, 그리고 레돈도의 3미들 거기다가 앞선 공격수였던 라울마저도 때때로 중원을 가담하면서 맨유를 고전시켰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레알은 맨유 상대로 3득점을 성공했습니다.
이날의 레돈도의 퍼포먼스는 두고 두고 회자될 전설적인 퍼포먼스였죠.
퍼거슨은 그뒤 전술을 바꿔서 후반전 베컴을 당시 중미로 돌리고 433시스템으로 변환을 꾀했고 2득점을 하면서 턱밑까지 쫓아갔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퍼거슨은 이날의 경기에 대해서 말하길
“ 우리는 상대 전술에 너무나도 적응을 늦게했다. 내가 너무 오래 생각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만일 4-3-3으로 빠르게 바꾸고 3톱을 세웠다면 우리가 힘들지만 이겼을 것이다. 내 스스로 기회를 걷어 찬 것이다. 3미들을 일찌감찌 세웠다면 레돈도를 제어하고 라울이 전방에서 미들지역으로 내려왔을때 아마 우리팀은 충분히 대처했을 것이다.” 라고 얘기했죠.
그러나 2미들의 수적 열세 문제는 다음시즌에도 이어졌습니다.
다음시즌 유럽대항전에서는 조별예선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벨기에 팀 안더레흐트와 네덜란드 리그팀 psv을 상대로 원정가서 각각 2:1 3:1로 패배하면서 안더레흐트가 1위, 맨유가 2위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맨유라는 거인이 벨기에 네덜란드 이 각 클럽에게 패배한 것은 그당시 충격이었죠.
이 두팀의 특징은 둘다 크루이프이즘에 영향받은 4-3-3시스템을 주로 활용하는 팀이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습니다.
중원에서부터 말렸던 것이죠.
이러한 모습은 8강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히츠펠트가 이끄는 뮌헨이 중원에서부터 맨유의 경기를 못풀게 만들고 트레블시즌의 복수를 해내자, 퍼거슨은 다음시즌부터 442가 아닌 다른 전술을 써야겠다고 더더욱 다짐하게 되었죠.
01/02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위치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였습니다. 알렉스 퍼거슨의 고향이기도 했죠.
퍼거슨은 고향에서 빅이어를 들어올리고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2년 연속 2미들이 문제시 되자 이를 바꾸려고 과감히 개혁했고 이 적합한 카드로 베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미들인 만큼 톱에 어울리는 선수를 모색한 퍼거슨은 뤼드 반니스텔루이는 원톱으로 쓰기 위해 데려왔습니다. 또한 스콜스를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둔 후 그 아래에 로이킨-베론을 위치시킨 정삼각형 3미들을 433 내지는 451을 도입하려고 애썼습니다.

이렇게 영입된 베론의 효과는 경기장에서도 바로 드러났습니다.
첫 8경기동안 4골을 넣었고 9월에는 이달의 프리미어리그 선수를 수상했습니다. 이기간동안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에버튼전 로이킨과의 원투패스를 통한 득점을 보고 그전에 맨유의 준주전 미드필더였던 니키버트는, 이제 내자리는 없어지겠구나라고 직감했다고 말했고
블랙번전 긱스를 향한 말도안되는 스루패스는, 세리에 라치오시절 팀을 우승으로 이끌던 바로 그패스마스터 베론이 바로 피엘에도 왔구나하고 팬들을 열광시키게 만들었죠.
하지만 작은 마녀 베론의 마법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맨유는 많은 득점을 올리고 있었지만 팀 밸런스의 문제를 야기하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01/02시즌 12월에는 순위가 9위까지 떨어졌습니다. 팀은 위기에 빠졌고 퍼거슨은 훗날 은퇴를 미리 발표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결국 퍼거슨은 3미들이 온전히 정착하기 전까지 442와 433을 번갈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퍼거슨의 3미들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습니다.
1. 잉글랜드의 피지컬적인 거친 축구에 베론이 적응 못했다는 의견
2. 로이킨이라는 맨유의 거인이 이미 있었고 베론이 해야할 역할들을 이미 수행하고 있어서 조합의 문제
3. 스탐의 아웃이 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한 36살의 블랑이 제대로 못해서 이미 팀의 밸런스가 망가져있었기에 베론탓이 아니다
등등이였죠.
실제로 베론은 유럽무대에서는 좋은 모습을 여전히 보였습니다. 챔스 조별에서 전년도 챔피언 뮌헨상대로도 맨유는 중원에서 괜찮게 풀어나갔고, 8강전 데포르티보와의 경기에서 맨유는 5:2로 앞서나갔고 이경기들에서 베론 역시 유려하게 경기를 조율했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4강 레버쿠젠상대로는 원정다득점으로 떨어졌습니다.
로이킨과의 문제 역시, 다음시즌 0203 로이킨이 부상으로 많이 결장하면서 베론이 시즌초반 굉장히 팀을 이끌고 좋은 모습으로 이끌었고
베컴을 향한 초장거리 원터치 스루패스가 나온 시즌 역시 이 시즌이었습니다.
1번의 문제였을수도 있고 2번의 문제였을수도 있고 복합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던 것이죠.
허나 베론의 활약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맨유는 442로 돌아와달라는 팬들의 압박, 그리고 퍼거슨 스스로도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442로 돌아가고자하는 의욕이 컸고 베론은 그렇게 맨유 주전에서 멀어지면서 첼시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베컴,긱스,킨,스콜스 이 기라성 같은 4명의 선수 안에 베론을 넣으려던 시도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과한시도였던 거죠.
0203에 리오퍼디난드가 오고 451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팀이 나아지는듯 했지만 맨유에게는 이렇게 굳이 돌아갈 필요 없이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걸 퍼거슨과 맨유팬들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에버딘의 마법사였던 퍼거슨과, 작은마녀인 베론이 함께 꿈꾼 3미들의 실험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베론을 통한 3미들 실험이 퍼기에 의해 성공했다면 무리뉴가 마케렐레가 함께 일으킨 433혁명이 조금은 빛바랠 수도 있었겠죠.
http://youtu.be/MaP_AH9LUYc
유튜브로 만든 영상을 칼럼으로 만들었습니다. 즐감하세용
지단, 베컴, 피구,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베론 이렇게 4명이였습니다

파르마시절 코파 이탈리아와 유로파리그의 전신인 UEFA컵을 우승시키고, 라치오로 이적해서는 99/00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고 코파이탈리아, 그리고 슈퍼컵을 우승시키면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특히 슈퍼컵에서 전시즌 트레블의 주인공인 맨유를 상대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베론은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여러 축구인들에게 각인되었고 퍼거슨의 눈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베론은 01-02시즌 시즌 퍼거슨이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습니다. 이적료는 그당시 잉글랜드 기준 최고 액수였던 2천 800만 유로였습니다.

베론 영입 당시 퍼거슨은 ‘선수한명에게 이렇게 비싼돈을 써본건 처음이다. 하지만 베론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거기다 베론의 플레이스타일은 잉글랜드 축구에 적합하다는 의견까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전형적인 no10인 트레콰르티스타 스타일이 아니라, 수비가담도 적극적으로 하며 볼을 오래끄는 이른바 볼호그 타입이 아닌 간결하게 바로바로 볼을 넘겨주고 스루패스도 과감하게 찌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EPL의 빠른 템포 축구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며 세리에보다 공간이 많은 이피엘에 오히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베론은 실패했죠.
어째서 퍼기는 그토록 원하던 베론을 영입했지만 실패했던 것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트레블 직후 시즌은 99/00시즌과 00/01시즌 맨유와 전술을 살펴봐야합니다. 트레블 이후 퍼거슨은 마음속에 은퇴를 계속 고민했고, 은퇴 전에 한번 더 유럽정상에 올라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트레블 이후로 맨유는 대권으로 가는길에 번번히 무너졌습니다.
이때 맨유의 문제점으로 계속해서 지적되었던 점은 2미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피엘은 442 시스템이 대세였고 맨유 또한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고 맨유의 주된 라이벌인 아스날 역시 442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유럽에서 상대하는 대부분의 팀들은 433같은 시스템을 쓰면서 3미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거죠.
442포메이션
2 미들과 3미들 그냥 대결해서는 수적 열세에 처하게 되는겁니다.

퍼거슨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트레블을 달성했던 9899시즌때는 양풀백을 굉장히 중앙지향적으로 배치하기도하고, 유벤투스전에는 베컴을 조금 더 중앙지향적으로 활용하는 형태를 가동하기도 했으나 이는 임시방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이 수적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2000년 8강전 2차전 맨유홈에서 레알마드리드의 델보스케는 3미들시스템을 맨유상대로 가동했습니다. 스티브 맥마나만과 이반 엘게라, 그리고 레돈도의 3미들 거기다가 앞선 공격수였던 라울마저도 때때로 중원을 가담하면서 맨유를 고전시켰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레알은 맨유 상대로 3득점을 성공했습니다.
이날의 레돈도의 퍼포먼스는 두고 두고 회자될 전설적인 퍼포먼스였죠.
퍼거슨은 그뒤 전술을 바꿔서 후반전 베컴을 당시 중미로 돌리고 433시스템으로 변환을 꾀했고 2득점을 하면서 턱밑까지 쫓아갔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퍼거슨은 이날의 경기에 대해서 말하길
“ 우리는 상대 전술에 너무나도 적응을 늦게했다. 내가 너무 오래 생각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만일 4-3-3으로 빠르게 바꾸고 3톱을 세웠다면 우리가 힘들지만 이겼을 것이다. 내 스스로 기회를 걷어 찬 것이다. 3미들을 일찌감찌 세웠다면 레돈도를 제어하고 라울이 전방에서 미들지역으로 내려왔을때 아마 우리팀은 충분히 대처했을 것이다.” 라고 얘기했죠.
그러나 2미들의 수적 열세 문제는 다음시즌에도 이어졌습니다.
다음시즌 유럽대항전에서는 조별예선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벨기에 팀 안더레흐트와 네덜란드 리그팀 psv을 상대로 원정가서 각각 2:1 3:1로 패배하면서 안더레흐트가 1위, 맨유가 2위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맨유라는 거인이 벨기에 네덜란드 이 각 클럽에게 패배한 것은 그당시 충격이었죠.
이 두팀의 특징은 둘다 크루이프이즘에 영향받은 4-3-3시스템을 주로 활용하는 팀이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습니다.
중원에서부터 말렸던 것이죠.
이러한 모습은 8강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히츠펠트가 이끄는 뮌헨이 중원에서부터 맨유의 경기를 못풀게 만들고 트레블시즌의 복수를 해내자, 퍼거슨은 다음시즌부터 442가 아닌 다른 전술을 써야겠다고 더더욱 다짐하게 되었죠.
01/02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위치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였습니다. 알렉스 퍼거슨의 고향이기도 했죠.
퍼거슨은 고향에서 빅이어를 들어올리고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2년 연속 2미들이 문제시 되자 이를 바꾸려고 과감히 개혁했고 이 적합한 카드로 베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미들인 만큼 톱에 어울리는 선수를 모색한 퍼거슨은 뤼드 반니스텔루이는 원톱으로 쓰기 위해 데려왔습니다. 또한 스콜스를 앞에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둔 후 그 아래에 로이킨-베론을 위치시킨 정삼각형 3미들을 433 내지는 451을 도입하려고 애썼습니다.

이렇게 영입된 베론의 효과는 경기장에서도 바로 드러났습니다.
첫 8경기동안 4골을 넣었고 9월에는 이달의 프리미어리그 선수를 수상했습니다. 이기간동안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줬습니다.
에버튼전 로이킨과의 원투패스를 통한 득점을 보고 그전에 맨유의 준주전 미드필더였던 니키버트는, 이제 내자리는 없어지겠구나라고 직감했다고 말했고
블랙번전 긱스를 향한 말도안되는 스루패스는, 세리에 라치오시절 팀을 우승으로 이끌던 바로 그패스마스터 베론이 바로 피엘에도 왔구나하고 팬들을 열광시키게 만들었죠.
하지만 작은 마녀 베론의 마법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맨유는 많은 득점을 올리고 있었지만 팀 밸런스의 문제를 야기하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01/02시즌 12월에는 순위가 9위까지 떨어졌습니다. 팀은 위기에 빠졌고 퍼거슨은 훗날 은퇴를 미리 발표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결국 퍼거슨은 3미들이 온전히 정착하기 전까지 442와 433을 번갈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퍼거슨의 3미들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습니다.
1. 잉글랜드의 피지컬적인 거친 축구에 베론이 적응 못했다는 의견
2. 로이킨이라는 맨유의 거인이 이미 있었고 베론이 해야할 역할들을 이미 수행하고 있어서 조합의 문제
3. 스탐의 아웃이 있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한 36살의 블랑이 제대로 못해서 이미 팀의 밸런스가 망가져있었기에 베론탓이 아니다
등등이였죠.
실제로 베론은 유럽무대에서는 좋은 모습을 여전히 보였습니다. 챔스 조별에서 전년도 챔피언 뮌헨상대로도 맨유는 중원에서 괜찮게 풀어나갔고, 8강전 데포르티보와의 경기에서 맨유는 5:2로 앞서나갔고 이경기들에서 베론 역시 유려하게 경기를 조율했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4강 레버쿠젠상대로는 원정다득점으로 떨어졌습니다.
로이킨과의 문제 역시, 다음시즌 0203 로이킨이 부상으로 많이 결장하면서 베론이 시즌초반 굉장히 팀을 이끌고 좋은 모습으로 이끌었고
베컴을 향한 초장거리 원터치 스루패스가 나온 시즌 역시 이 시즌이었습니다.
1번의 문제였을수도 있고 2번의 문제였을수도 있고 복합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던 것이죠.
허나 베론의 활약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맨유는 442로 돌아와달라는 팬들의 압박, 그리고 퍼거슨 스스로도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442로 돌아가고자하는 의욕이 컸고 베론은 그렇게 맨유 주전에서 멀어지면서 첼시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베컴,긱스,킨,스콜스 이 기라성 같은 4명의 선수 안에 베론을 넣으려던 시도는 어찌보면 너무나도 과한시도였던 거죠.
0203에 리오퍼디난드가 오고 451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팀이 나아지는듯 했지만 맨유에게는 이렇게 굳이 돌아갈 필요 없이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걸 퍼거슨과 맨유팬들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에버딘의 마법사였던 퍼거슨과, 작은마녀인 베론이 함께 꿈꾼 3미들의 실험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베론을 통한 3미들 실험이 퍼기에 의해 성공했다면 무리뉴가 마케렐레가 함께 일으킨 433혁명이 조금은 빛바랠 수도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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