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중국 내부사정을 중국 기록보다
조선왕조실록이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할 공녀들과 명황실 내부의 이야기가 그것이죠
중국 스스로가 기록하기 뭣해서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사신들과 공녀들을 통해 듣고 조선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조선왕조 실록을 바탕으로 글을 써 봅니다
태종8년(1408년) 8월 명에서 사신 황엄이 도착합니다
사신 황엄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죠
당시 명의 황제는 영락제였는데
그가 실시한 베트남원정과 베트남의 멸망에 조선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베트남이 다시 독립하자
세종과 신하들이 잘됐다고 축하하고 명황제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뒤이은 몽골,서역원정과 정화를 파견해 남방항로개척까지 나서고 있던 때였죠
그러다보니 "저 놈은 지 맘에 안들면 바로 쳐들어올 놈"
이라는 게 태종과 조선조정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요구를 수락하기로 합니다.
전국적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13세이상 25세 이하의
양가집여성을 대상으로 한 모집(을 가장한 강제연행)이 있었는데
처녀들은 미친척하거나 장애인인척하거나
혹은 금혼령을 어기고 결혼해서 공녀로 가는것을 피하려 합니다.
이에 부모들은 투옥되거나 관직을 박탈당하기도하고
큰 벌금을 물어야만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부모들은 보내지 않으려 버텼습니다예를들어 권집중의 딸과 함께 양대미녀로 손꼽히던
권문의(호패법의 발안자)의 딸도 잡혀갈뻔
하지만 권문의는 딸이 아프다고 버텼고
그 일로 황엄이 항의하자 권문의를 투옥시킵니다
(만..곧 풀어줍니다..어쨋건 딸은 지켰으니 성공)
그렇게 두달간 300명의 여성이 모집되어
몇번에 걸친 심사 끝에 그중 7명이 추려내어집니다
최종 5명이 정해지는데 최종심사(?)는 태종과 명사신 황엄이 맡았고
어쩻건 총 5명이 뽑혀서 명으로 가게 됩니다
면면을 살펴보자면
전 공조판서 권집중의 딸 나이는 18세 경상도 안동부 출신.
전 판서 임천년의 딸 나이는 17세 충청도 회덕현 출신.
전 영주지사 이문명의 딸 나이는 17세 경기도 인주 출신.
사직 여귀진의 딸 나이는 16세 풍해도 곡성군 출신.
수원기관 최득비의 딸 나이는 14세 경기도 수원 출신.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황엄이 떠나자
가족들은 다들 길가로 나와 통곡했고
아버지나 오빠,남동생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을 전송하던 대신 권근 도 그 모습을 보고
슬픔을 참지못해 이런 시를 남겼죠
구중 궁궐에서 요조 숙녀 생각하여 / 九重思窈窕
만리 먼 나라의 예쁜 처녀 뽑아가네 / 萬里選娉婷
가마 타고 가는 길 멀기도 하니 / 翟茀行迢遞
고국이 점점 아득하구나 / 鯷岑漸杳冥
어버이에게 차마 하직 못하니 / 辭親語難訣
참는 눈물 닦으면 또 떨어지네 / 忍淚拭還零
서로 이별한 곳 그리운데 / 惆悵相離處
고향 산은 꿈속에 푸르네 / 群山入夢靑
그렇게 길을 떠난 공녀들은 북경에서 영락제와 마주하게 돼는데...
조선에서도 미녀로 이름높았던 권씨녀에게 한눈에 반한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제2황후인 현인비의 자리를 줍니다...
당시 황후이던 서황후는 오빠가 반란을 일으켰다 죽어서 거의 유폐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명나라건국공신이자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서달이었기 때문에 차마 내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죠
그런 이유로 2황후 자리는 사실상 1황후나 다름없는 위치였지만...
그게 훗날 조선 공녀들에게 피바람이 불게하는 원인이 됩니다
조선에서 손에 꼽히던 미녀인데다
옥퉁소를 잘불고 요리에 능하여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현인비
그렇게 2년이 흘러 1410년이 되었습니다
영락제의 현인비총애는 여전해서 전쟁터까지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고
신하들에게 현인비를 위한 시를 지어보라 미션을 내릴정도였죠
하지만 갑자기 현인비가 급사합니다(당시 나이 20세)
전날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어버렸죠
그래서 영락제의 슬픔은 더 깊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흐릅니다
1413년 영락제에게 여씨 성을 가진 궁인(한족)이 참소를 넣습니다
바로 현인비는 독살당한 거라는 참소였고
범인은 조선에서 온 공녀 여씨 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결과 죽기 전날밤 현인비가
공녀 여씨가 가져온 호도차를 마셧다는 게 드러납니다.
분노한 영락제는 당장 여씨를 잡아오라 명령했고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참혹한 고문끝에
황제의 총애를 질투하여 독살했다는 자백을 얻습니다
여씨는 산채로 온몸을 포를 뜨는
능지처참형을 당하여 처참하게 죽습니다(당시 나이 21세)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 온 다른 공녀들에게도 불똥이 튀어
1차 공녀(1408년,5명)중 임씨(22세)는 목을 메어 xx하고
이씨(22세)는 고문끝에 참형을 당합니다
1차로온 5명중에 살아남은건 마침 남경궁전에 가있었던 가장 어렸던 최씨(19세)뿐이었습니다
또한 온지 얼마안된 2차공녀(1410년, 1명)에게도 혐의가 가자
정씨(21세)역씨 고문에 대한 두려움에 스스로 목을 메어죽습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신하들은 여씨의 가족도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확실하게 여씨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는게 아니므로 가족을 처벌하는건 불가하다고 주장하죠
1417년
조선에 현인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명은 공녀를 더 요구했고
그리하여 태종 17년(1417) 5월 조선에서는 3차 공녀선발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규모를 크게하고 심사를 엄격히 할 것을 요구하여
무려 600명의 여인을 선발해 뽑고 뽑아서
2명의 최종합격자(?)를 명으로 보내는데
지군창군사 한영정의 넷째딸 한씨녀와
부령 황하신의 딸 황씨녀였습니다.
여성의 외모에 대해 기록이 박한 실록에서마저
한씨녀는 실록에 나이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고고하고 품위있게 아름다우며
황씨녀는 17세로 대단히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니
확실히 대단한 미녀들이긴 했던 모양이죠
명으로 가던도중 황씨녀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약도 별다른 효험을 보지 못합니다.
황씨녀는 시원한 김치국물이 먹고싶다고 애걸하지만
중국땅 한가운데서 구할수 있는게 아니어서 꽤나 골치를 썩힙니다..
하지만...얼마후 황씨녀는 복통이 가시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북경에 다다라 둘은 영락제를 만나는데
영락제는 그녀들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습니다만...
황씨녀가 오는 도중 배가 아팠던건
사실 임신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낙태를 위해 약을 먹어서 배가 아팟던 것이고
오는 도중 아무도 몰래 사산했다는 사실이 이후 조사결과 드러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형부 김덕장의 옆집에 살던 관노였으며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황씨가 공녀로 뽑혀가게 되자
형부 김덕장에게 부탁하여
정표로 황씨녀에게 빗을 건낸 정황도 적발됩니다.
(이 사건을 드라마 장영실에서 써먹기도 했죠..
장영실의 첫사랑 황씨녀...이렇게...)
당연히 명황실은 뒤집어졌죠...
아니 임산부를 보내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면서
영락제는 열받아서 조선조정에 항의하려 합니다
이 상황은 외교분쟁화 할 수 있는 사안이었고
황씨녀의 목숨이 날라가는건 물론
황씨녀 집안이 풍비박산날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이 소식을 들은 한씨녀가 영락제에게 찾아갑니다
(한씨녀도 "강혜장숙여비"에 봉해져 있었습니다)그리고
"일국의 왕이 어찌 사사로이 여염집의 여자일까지 아시겠습니까.
부디 그러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황씨녀에게 너무 무거운 처벌도 하지 말아주시옵소서"라며 영락제의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호소하죠한씨녀의 눈물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영락제는
조선측에 항의하기로 했던 걸 없던일로 하고
황씨녀의 처벌을 한씨녀에게 맞깁니다
그러자 한씨녀는 황씨녀를 그 자리로 불러오게 한뒤
따귀를 한대 때리는 걸로 처벌을 대신하죠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영락제가 한씨녀의 부탁을 들어준거나
황씨녀의 과거가 드러났음에도 내치지 않고
후궁에 둔걸 보면 확실히 둘다 예쁘긴 예뻣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다시 2년이 흘러 1420년이 되었습니다...
이해 명의 내전에서는 대형 스캔들이 터집니다
바로 앞에 공녀 여씨를 참소했던 궁인 여씨(한족)와
궁인 어씨 그리고 환관들이 그룹XX를 즐겼다는게 드러난 것이었죠
이 소식이 영락제에게 들어가자
처벌을 두려워한 여씨와 어씨는 xx합니다
하지만 영락제는 어씨를 맘에 들어해서
그다지 크게 처벌할 생각이 없었던터라
xx하게 내버려둔 그들의 주변인들을 조지는데....
그때 끌려가던 한 궁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현인비를 공녀 여씨가 독살했다고 참소한건 여씨(한족)의 모함이었습니다!"
그 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한 영락제는 현인비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명하고
재조사결과 한족 궁인 여씨는 공녀 여씨에게 동성이니 친하게 지내보자며
황제와 줄을 좀 대줄것을 부탁하지만 공녀 여씨는 쌩깝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데다
얼마후 바깥 행차에서 가마의 차례문제로 시비가 붙어
공녀 여씨에게 뺨을 맞는 일까지 생기자
황엄과 모의하여 영락제에게 참소하고
아랫사람들을 이용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농락당했다는걸 안 영락제는 미쳐버렸고
황엄은 이미 죽고 없던터라 부관참시하고
그의 가족은 물론 종까지 다 살해했으며
조금만 관련이 있거나 고문에 의해 나온
허위자백이 명백해 보이는 증언까지 모두 받아들여서
수많은 궁인들을 학살합니다누구의 말도 귀에 담지 않았으며
도리어 말리려는 신하들과 궁인역시 모두 죽여버렸죠이 사건을 일컭어 "어여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 3000명에 달하는 후궁,궁녀,환관이 살해당하여
거의 전멸할 지경에 다달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어느날 벼락이 봉천,화개,근신궁 3군데에 떨어지자
영락제가 하늘의 경고라고 보고 살육을 중지할거라
모두가 기대했다는 증언이 실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지만
영락제는 여전히 살육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선공녀들에게도 이 시기는 잔혹한 시기였습니다
앞선 위기를 넘겼던 황씨녀 역시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단순히 겁이 많았는지 아니면 성격이 안좋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나라 사신들의 말로는 성격이 안좋았다 합니다)
고문을 하자 주절주절 주위사람들을 다 들먹여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가죠
그리고 자신 역시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뒤
목이 베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 20살이었습니다.
저 세상에서는 이 생에서 못다했던 연인와의 사랑을 이루었을까요...
그러나 아무리 영락제가 미쳤어도
총애하던 여비 한씨녀까지 직접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냉궁에 감금하고 음식을 끊어 버립니다.
그렇게 천천히 한씨녀는 죽어갑니다
하지만 평소 한씨녀는 아름다운것 뿐만아니라
주위사람에게도 항상 따뜻하게 대해줬었고
그랬던 그녀를 불쌍히 여긴 환관 한명이 몰래 음식을 조금씩 넣어줘서
한씨녀는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가까이 지나 겨우 영락제가 이성을 되찾아갈 무렵까지
한씨녀는 감금당한체 살아남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몇년간 한씨녀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1423년 한씨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사신이 와서 대신 제사를 지내고 간 것
이쯤 한씨녀의 남동생인 한확을 영락제가 마음에 들어해
훗날 차기황제가 되는 인종의 딸을 주어 손자사위로 삼으려 했던것을 볼때
아마 한씨녀도 어여의 난에서 살아남은 이후
계속 총애받으며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1424년 7월 18일 운명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영락제가 사망한 것이었죠
명나라는 몽골의 영향으로 순장제도를 계속 운영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훗날 잠재적인 스파이가 될 가능성도 있는
외국출신 공녀들은 특히 순장 1순위였죠
영락제의 장례식날 30여명의 궁인이 순장되게 되는데
여기에 여비 한씨녀뿐 아니라 1차로 온 공녀중
이때까지 살아남은 최씨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최씨녀는 28세였으며
공녀가 대체로 18살을 넘지 않았던걸 추정해볼때
한씨녀는 많이 잡아도 25세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순장되는 궁인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이 제공됩니다.
당시 순장풍습은 목을 메달아 죽인후 무덤에 같이 묻는 것이었습니다
궁인들은 차례로 단상위에 올라갔고 환관들은 그녀들의 목에 밧줄을 걸었습니다.
이중 신분이 높았던 한씨녀는 목에 밧줄이 걸린체로
식을 참관하던 명나라의 차기황제 인종에게 부탁을 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죽더라도
조선에서 저를 따라왔던 저의 유모는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인종은 그 부탁을 듣고 식이 끝나면
유모 김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리라 허락하죠
그리고 유모가 울면서 유언을 들으러 오자
한씨녀도 울면서 조선말로 유언을 남깁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울음소리와 유언이 섞이자 조선말을 모르는 환관은
유언이 끝난줄 알고 단상을 차버리고
한씨녀는 그렇게 유언도 끝마치지 못한채 목이 메달렸습니다.
조선의 최고미녀중 한명이자
영락제가 너무나 착하고 똑똑하다고 찬탄했던 여인의 최후로는
너무나 비참한 죽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마지막 소원조차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 지지 못합니다.
바로 유모 김흑이 조선으로 돌아가
명황실의 복잡한 내부사정이 조선에 알려지면
조선이 현인비사건이나 어여의 난을 핑계로
타타르와 연합해 요동을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조선이 요동을 차지한다면
명나라가 당해내기 힘들다는 신하들의 의견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인종은 유모 김흑의 송환을 취소하고
김흑에게 벼슬을 내려 명나라에서 살게 합니다.
훗날 김흑은 조선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한씨녀의 죽음으로 부터 10년도 더 지난 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한씨녀가 죽은지 4년이 흘렀습니다.
과연 그런 한씨녀의 고통으로 가장 득을 본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그녀의 남동생 한확이었습니다
한씨녀가 공녀로 갈때 빈한한 삶을 살던 그는
누이가 명황제에게 총애받는 대가로 승승장구합니다.
판한성부사,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 서성부원군, 좌의정에까지 오르며
명나라에서도 부마의 자리를 제의받고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받아 엄청난 권세를 휘두릅니다.
(부마제의는 환확이 부모님 모셔야 한다고 거절..
주원장이 완전 추남인데...주원장의 손녀랑 결혼하라는거니...
유전의 법칙이 무섭더냐..)
세종 9년 궁녀를 건드렸다가 걸려서 신하들이 죄줄 것을 청하였지만
세종은 이빨을 깨물며
"그놈은 내가 죄를 줄 수가 없는 놈이다..."
라고 분해할 정도였습니다.
세종 9년(1427년)
다시 명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하는 사신이 옵니다.
한씨녀의 동생이자 한확의 막내여동생...
실록에 명으로간 공녀중
유일하게 이름이 남아있는 인물 한계란(韓桂蘭)
방년 19세에 아름답기로 유명하던
그녀도 공녀모집에 나올것을 요구받습니다
하지만 과거 빈한한 집안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한씨녀를 보내야 했던것과는 달리
이제 한씨집안은 명황제와도 교분이 있는 엄청난 권세가가 되어 있었고
한확이 조금만 힘을 쓰면 안갈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확은 한씨녀의 죽음으로 끊어진
명황실과의 연을 다시 이어보고 싶었던 걸까요
막내여동생을 공녀로 다시 보내려 합니다.
한계란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앓아누워 버리죠
그러자 한확은 얼른 일어나 공녀로 가라는듯
약을 지어 한계란에게 보내줍니다.
그녀의 마음은 어땟을까요?
언니를 팔아서 그토록 처참하게 죽도록 만들고
이제는 자신마저 팔려하는 오라비가 정말 야속하지 않았을까요
실록에는 그녀가 오라비 한확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 36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1일(무자) 4번째기사
"누이 하나를 팔아 이런 부귀를 누렸으면서
이제 약까지 써가면서 어떤 영화를 더 누리려 하십니까?"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시집갈때를 위해 준비해둔
비단이불을 꺼내어 은장도로 모두 찣어버리고
혼수용으로 모아둔 재물을 주위사람에게 모두 나누어주며
삶을 포기하다시피한 모습으로 공녀로 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한계란은 사신의 출발에 맞춰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해 공녀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7명의 여인이 공녀로 떠났으나
선덕제의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다음해 다시 공녀를 요구합니다.
이제 운명을 피할수 없게된 한계란은
1428년 영락제의 아들인 선덕제에게 공녀로서 가게 됩니다.
(한씨녀의 죽음을 참관한 명나라 인종 홍희제는 제위 2년만에 사망했습니다)
그녀가 명으로 떠나는날 도성 사람들은 나와 그녀를 바라보며"언니가 중국으로가 순장당한것도 억울한데 동생도 그 뒤를 밟는구나"라며 산송장이나 다름없다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계란을 북경으로 호송한 한확은
전 해에 명으로간 7명의 편지를 받아 왔는데
그 안에는 그녀들의 편지와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비록 고생하고 있지만
모두 함께 열심히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걸 본 가족들은 그녀들의 편지와 머리칼을 안고
"이제 그 아이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다"
라며 통곡했다는 가슴아픈 기록도 실록에는 남아있습니다.
"어여의 난"과 현인비사건이 당시 명에서도 큰 사건이고
조선과 관련이 있어 실록에 자세히 남아 있으나
이후 명에 "토목의 변"과 같은 국가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혼란기가 오면서
더이상의 한계란과 공녀들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어집니다.
단편적으로 나온 기록으로 추정해 볼때
한계란은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란이 명에 가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많이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선덕제가 죽을당시
27살이던 그녀는 순장을 피하는데 성공했고
이후로는 "토목의 변" 덕분에 순장당하거나
"어여의 난" 같은 재난을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토목의 변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이 나오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한계란이 명에 있는동안 4명의 황제가 바뀌면서
4명의 황제를 모셧다 하여 그녀는 "공신부인"이라는 작위을 얻고
특히 성화제는 어렸을때부터 그녀가 키워서 성화제는 그녀를 할머니로 모셧습니다.
명황실에서 뛰어난 학식과 총명함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사부"으로 불리웠고
성격 역시 좋아서 그녀가 죽자 태후부터 태자까지 모두가 슬퍼했으며
그녀의 장례식때는 지금의 장차관급인 각부 시랑들이
묘비와 제문등을 나누어 쓸 정도로 존경 받게됩니다.
그렇게 한계란은 오빠 한확보다 더 오래 74살까지 살았습니다.하지만 자신을 팔아넘긴 오빠 한확과 조카들에게는 의외로 잘해 줬고
62살때인 1472년 자신의 조카인 인수대비에게
선물을 보낸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아마 비록 자신을 팔아넘긴 오빠가 밉지만
유일하게 이역만리 타향에서 만날 수 있는 혈육이다보니
용서하게 된게 아닐까요.
한확은 이후 딸을 수양대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데
이가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를 죽였다가
훗날 연산군에게 박치기를 당하고 홧병으로 죽는 인수대비이며
그녀와 수양대군의 아들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훗날 성종과 월산대군 입니다.
또한 그는 계유정난에 단종을 폐위시키고
수양대군을 세조로 옹립시키는데 공을 세우고
세조의 즉위를 명에서 허락받는데도 공을 세웁니다.
그리고 1456년 53살의 나이로 명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도중 객사합니다.
비록 동생을 팔아먹고 이런저런 패악을 끼치긴 했지만
뛰어난 머리와 정치감각을 지닌건 사실이었고
명의 금,은 요구를 멈추게 하는 등의 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확의 아들들은 말그대로 개차반이라
온갖 비리와 패악을 저지르다가 이후 연산군대에 피를 보게되죠
(한씨분들 소송금지요...ㅜㅡ)
한계란보다 1년 먼저인 1427년 명으로 갔던
7명의 공녀들은 더 기록을 찾기가 힘든데
1458년 기록상으로 이유는 알수 없으나
1명이 이미 사망한 상태라는게 기사에 나오며
이때 살아있던 6명중 3명이 사신을 통해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해왔으나
명조정에 허락받지 않고 사적으로 보낸거라고
가족들에게 전해주지 않고 다시 돌려보낸 기록이 있고
사신들이 그녀들의 부모님들의 집도 방문하려하지만
그들의 집이 못산다는 이유로 방문을 막은 기사가 있습니다.그 공녀들도 나이가 이때쯤 50이 다되가던 때인데
너무 잔인한 처사가 아닐수 없죠
(다만 이중 한명이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설이...
자세한 내용은 아래 ps참조)
공녀공출을 본의 아니게 멈추게 만든
토목의 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선덕제가 죽고 9살에 황제가 된 천통제는
21살에 몽골원정을 떠났다가
토목보전투에서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황제가 포로로 잡혀버리자 명조정은 혼란에 빠졌으나
곧 천통제의 이복형제를 경태제로 옹립합니다.
몽골은 황제를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금방 명이 새 황제를 선출하자 김이 팍 빠지죠
그래서 황제를 풀어줍니다..전 황제가 돌아오자 명조정은 진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조정이 두파로 나뉘어서 정통성싸움을 하게 된 것이죠
결국 1년만에 천통제파가 승리하여 천순제로 이름을 바꾸어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순제는 7년만에 사망하는데
몽골에 잡혔던 트라우마 때문에 몽골의 풍습을 저~~~엉말 싫어해서
유언으로 순장을 금지시킵니다.
이런 혼란에 공녀를 요구할 정신도 없었고
이후 황제가 된 성화제는 자신을 꽉잡고 있던 16살 연상의 만귀비가 워낙 독부였었고
흥치제는 정실에게만 충실했던 황제라 공녀요구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은 뭐...명나라 암군 F4로 불리는 황제들이 줄줄이 나와서
명은 그대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태니 더 이상 요구할 정신이 없었죠
명에 간 공녀는 약 20년간에 걸쳐 총 146명이며
이들중 이 글의 주인공이었던 양반가의 여인은 30명 안팎이었고
대부분은 가창비,집찬비로 불리우는
가수,요리사등의 집책을 맡고 있는 양인,천민출신 시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후궁으로 가는 양반가출신 여인들의 그나마 가끔 나오는 기록에 비하면
양인,천민출신 공녀들의 기록은 출발할때 실록에 딱 한줄 나오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소재로 삼기가 힘드므로 다루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1424년 영락제가 죽기전
과거 현인비가 해주던 조선음식이 먹고 싶다고 집찬비들을 요구했는데
11~12세의 아이들로 요구한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조정에서도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잔혹한 처사라고 반발이 일었으나
결국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모집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보내기 직전 영락제가 죽어 이 계획은 취소되었지요
이후 공녀는 사라졌다가 병자호란 이후 다시 부활하는데
청은 조선의 공주급 여인을 요구하지만 공주가 2살밖에 안된 관계로
왕족의 딸을 공주로 봉하여 청으로 보내는데 이가 "의순 공주"입니다.
그녀는 청의 섭정 도르곤의 첩으로 간 후
도르곤이 반역죄로 처형당한후 다른 신하에게 하사되었다가 훗날 귀국합니다.
그리고 이후 청의 공녀요구에는 공노비들중 뽑아서 보내게 됩니다.
이들의 숫자는 160명이었습니다.
====================================fin=============================
PS
1.
일설에는 명나라 경태제의 어머니가 조선공녀라는 설이 있습니다..
선덕제에게 보내진 조선공녀 7인중 한명이었던
공녀 오씨가 경태제의 어머니라는 이야기죠
조선왕조실록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성호사설에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사실은 그럼....이라는 식으로요..
또한 명나라 사신이 오씨녀의 아버지 오척의 벼슬도 더 높이고
명황실가족들이 쓰는 모자를 쓰게하라는 이야기가
간접적으로 실록에 실려있어서 그것 역시 생각해볼만한 설입니다
선덕제때 유독 조선음식이나 노래를 하는 시녀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었구요..2.아래는 한계란이 죽은후 쓰여진 제문입니다
대충 어떤 성품이었는지 알수 있죠부인 한씨는 성은 한이요 이름은 계란인데, 대대로 조선국 재상의 집안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영정이요 어머니는 김씨인데, 영락 경인년(1410년) 4월 9일에 태어났다.
선덕 정미년(1428년)에 황실에 뽑아 올려서 이제까지 57년이 되었는데,
네 황제를 거쳐 섬겨서 따르고 공경하고 삼가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
갑자기 병이 들자 황제가 좌우 사람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또 어의에게 명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력이 없이 죽으니 때는 성화 계묘년(1484년) 5월 18일이다.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애석해하기를 여러번하여 태감 왕거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황태후,황제 후궁전, 태자전이 모두 슬퍼하였다
...중략...
장사는 이 해 6월 21일에 하였는데, 묘는 북경 서쪽 향산 언덕에 있다.
...중략...
부인은 성품이 유순하고 착하여 말을 망령되게 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떳떳한 법이 있으며 황실의 기념일을 하나하나 능히 알고 기억하니,
모든 집사가 함께 스승으로 높이 받들었다.
무릇 제사등의 행사에는 반드시 나아가서 물어보면 거의 틀림이 없었고,
행사준비에 반드시 지시를 구하였으니, 여기에 정밀함이 지극하였다.
혹시 여러 조정의 내령을 잊음이 있어서 와서 밝히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말하기를,
이 것은 선묘의 영이고, 이 같음은 영묘의 영이다. 라고 하니,
이런 까닭에 황제와 황후 이하가 모두 일컫기를 ‘스승님’라고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다.
여러 조정에서 하사한 것은 다 기록할 수 없고,
현 황제에 이르러 하사한 것은 전에 비하여 더욱 후하였는데,
부인이 이따금 받으면 더욱 겸손하고 삼가며 두려워하여 감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살아서는 황가의 보살핌을 누리고, 죽어서는 거듭 은혜의 내림을 입음이 마땅하다.
유제문에 있기를,
‘온화하고 유순하며 공경하고 삼가서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다.’고 하였고,
고봉사에는, ‘공경하고 부지런하며 삼가고 세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였다.’는 글귀의 표창이 있었으니,
어찌 지나친 칭찬이겠는가? 부인은 어질도다!
...중략....
부인은 해동에서부터 오래 규중에 있으면서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배우고 익힘이 많았으므로,
아름다운 행실과 능함이 있어서 같은 무리에게 존중을 받고 조정에 알려져서
살아서와 죽어서 넓은 은혜와 큰 덕을 받음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하략...
이부상서(吏部尙書) 만안(萬安)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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